며칠 전 방영되었던 드라마 <철인왕후 클립>을 정말 재미있게 봤는데, 보다 보니 조선 왕들의 계보를 다시 한번 정리해 보고 싶어졌습니다:)
학교다니면서태정태세문남편의노래로조선왕의순서를열심히외웠는데이것또한외우려다가는중간에혼란이생겨서이번기회에잘외워보려고합니다!
조선왕계보태정태세문단지를 정리합니다.
태정태세문단세예성연중의명선광인효현숙경영정순헌철고순27대왕순 조선왕순을외울때는머릿글자를외우면27대왕순을쉽게외울수있으니잘라서외우세요:)
대전 대새문당세예선영중 명성광 인효현숙 경영 정승헌 철고승
보통 이렇게 썰어서 잘 외우죠?저도이렇게외웠는데요즘여러조선왕계보송들이나오고있어서제취향에맞춰외우시면될것같아요:)
그러면 조선시대 각 왕들의 특징과 업적을 정리하면서 기억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제가 참고한 사진의 출처는 상상의 집 온더보드 게임에 나오는 이미지입니다!
제1대 태조[이성계] 재위 1392~1398 고려말 우군도통사로 요동정벌을 위해 북진하고 위화도에서 회군한 뒤 정도전 등 신진사대부 세력과 손을 잡고 정치적 실권을 장악한 이성계는 1392년 공양왕을 양위하고 스스로 조선왕조의 태조가 되었다.
그는 도읍을 한양으로 옮긴 뒤 도성을 쌓고 도로와 관청, 시장, 학교 등을 건설하며 새 왕조의 기틀을 다졌다.
제2대 정종[이방과] 재위 1398~14002차례의 왕자의 난을 통해 왕위에 오른 제3대 왕 태종은 병사제도를 폐지하고 의정부와 삼군도총제부를 설치하는 등 관제개혁을 통해 왕권강화에 힘썼다.
의금부를 설치하여 법사제도를 정비하고, 사간원을 독립시켜 대신들을 견제하기도 하였다.
또한 억불순유 정책을 강화하여 전국의 사찰을 정리하고, 호패법으로 인구를 정확히 파악하였으며, 북방의 여진족을 물리쳐 국경을 튼튼히 하였다.
제3대 태종[이방원]재위 1400~1418 제2차 왕자의 난을 통해 정조의 심양 유발(왕위 늑골) 형제 세습, 다양한 정책으로 조선왕조의 기틀을 닦았다.
제4대 세종[이도] 재위 1418~1 4504대 왕 세종은 젊은 학자를 등용하여 유교 정치를 실현할 수 있었다.
세종은 정책연구기관인 집현전을 두어 한글을 창제하고 측우기와 달력을 제작하고 아악을 정리하는 등 조선의 독립적이고 독창적인 문화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세종대에는 잘 알려진 황희나 맹사성과 같은 훌륭한 재상을 등용해 왕권과 신권의 조화를 이루었고, 백성을 위한 민본정치가 꽃을 피웠다.
국방에 있어서도 김종서의 4군 6진 개척으로 국토가 확장되는 등 다방면에서 훌륭한 치적을 쌓았다.
5대 문종[이향] 재위 1450~1452학문에 밝고 인품이 좋으며, 세종의 뒤를 이어 유교적 이상정치로 문화를 발전시켰다.
제6대 단종[이홍위] 재위 14521455계의 유사화로 수양대군에 의해 강원 영월로 유배돼 피살됐다.
200년 후 숙종 때 왕위를 다시 찾아 단종이라 하였다.
태정태세문단세예성연중명선광인효현숙경영정순헌철고순조선27대왕
제7대 세조[이유] 재위 1455~14687대 왕 세조는 계유정난을 통해 왕권을 장악했다.
세조는 의정부의 정책결정권을 폐지하고, 재상의 권한을 축소해 왕권을 강화했으며, 과전법을 폐지하고, 직전법을 실시했으며, 중앙군 제도를 개편하는 등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했다.
8대 예종[이황] 재위 1468~1469세조 때부터 시작된 경국대전을 완성하였다.
제9대 성종[이혈] 재위 1469~14949대 왕 성종은 세종과 세조의 치적을 기반으로 문물제도 정비를 완비함과 동시에 경국대전을 편찬하여 통치의 기본이념과 방향을 법제화하였다.
또한 세종 시대의 집현전 격인 홍문관을 설치하고 사림파를 등용해 훈구파를 견제했다.
제10대 연산군[이윤] 재위 1494~150610대 왕 연산군은 폭군으로 무웅사화, 급사화를 일으켜 많은 학자들을 죽이고 폭정을 펼쳤으나 중종반정으로 폐왕되었다.
11대 중종[역] 재위 1506~1545 혁신정치를 도모하다 훈구파의 원망으로 실폐되고 1519년 기묘사화, 신사화를 가져왔다.
12대 인종[이호] 재위 1545~1545기 묘사화로 사라진 현량과를 부활시켰다.
조선 제27대 태정 태세문단 세예성연중의 명선광인 효현숙경영 정순헌 철고순의 업적 등을 일일이 조사합니다.
🙂
13대 명종[이환] 재위 1545~1567 을사화, 정미사화, 을유사화, 을묘왜변을 쏘았다.
제14대 선조[이연] 재위 1567~1608~제14대 선조 때는 당파 싸움의 혼란을 겪었고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의 발발로 어려움을 겪었다.
선조왕이 의주까지 피신하는 등 수세에 몰렸으나 각지에서 일어난 의병과 이순신의 뛰어난 활약으로 일본을 물리쳤다.
15대 광해군[이혼] 재위 1608~1623~15대 광해군에 이르러 전후 복구사업에 힘썼다.
명나라와 후금 사이에 중립외교를 펼치던 광해군이 인조반정으로 유배됐다.
제16대 인조[이종] 재위 1623~1649~16대 왕인조는 병자호란으로 남한산성으로 피신했다가 청나라에 굴복하고 말았다.
송시열과 송준길 등 대학자가 잇따라 배출됐지만 당파 싸움은 더욱 치열해졌고 붕당 간 세력균형이 깨졌고 왕권도 불안해졌다.
17대 효종[이호] 재위 1649~1659 조선왕조 유일, 청나라 선양에서 출생. 청나라에 8년째 볼모로 잡혀 있는 돌아와 즉위한 후 이를 설욕하려고 국력을 양성하였으나 실현되지 않았다.
제18대 현종[이연] 재위 1659~1674 즉위 초부터 남인과 서인의 당쟁으로 많은 유신이 희생되었다.
대동법을 실시하여 구리 철제 활자 약 10만 자를 주조하였다.
제19대 숙종[이순] 재위 1674~1720~19대 왕 숙종은 국왕이 정치 무대의 중심에 서서 붕당 간의 세력 균형을 조절하기 위한 탕평책을 펴는 한편 대동법을 전국에 실시하여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혼란한 민심을 수습하였다.
20대 경종[이윤] 재위 17201724 신임 사화 등 당쟁이 절정에 달했다.
제21대 영조[지금]재위 1724~177621대 영조에도 탕평책을 시행하여 붕당의 폐해를 완화하는 한편 민생안정과 산업진흥을 위한 개혁정책을 실시했다.
영조는 속대전 등을 편찬하여 법치체제를 재정비하고 농업정책과 수취제도의 개선에 힘썼다.
또 균역법을 시행해 청계천을 준설하고 사치풍조를 금지하는 각종 조치를 내리는 등 재위 기간 중 많은 업적을 남겼다.
제22대 정조[이산]재위 1776~1800~22대 왕 정조는 규장각을 통해 왕권을 지탱할 인재를 육성하는 한편 숙종과 영조의 탕평책을 이어받아 더욱 적극적으로 전개하였다.
그는 100여 차례의 대궐 밖 행차를 통해 백성들의 삶을 직접 보고 억울함을 왕에게 직접 호소할 수 있게 했으며, 중하급 관리 중에서도 유능한 인물을 직접 선발해 국정운영을 맡겼다.
제23대 순조[이공] 재위 1800183411세 34년 4개월 정조의 서자인 문효세자의 요절로 등극.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 김씨가 20세까지 섭정.안동 김씨 세도정치 시작 신유 사옥을 비롯해 세 차례의 천주교 대탄압이 있었고, 1811년 홍경래가 난을 일으켰다.
제24대 헌종[이환] 재위 1834~1849 순조비 순원왕후 김씨가 2년간 섭정.천주교 탄압
제25대 철종[이원범] 재위 1849~186426대 고종[이명복] 재위 1864~1907~26대 왕 고종은 흥선대원군이 물러나 친정하면서 개항을 통해 문호를 개방하였다.
청나라와 일본을 비롯한 열강의 세력 다툼 속에서 고종은 일련의 개화 정책을 추진했으나 실패했다.
이 과정에서 위정척사파의 반대와 임오군란, 갑신정변, 동학농민운동을 거치면서 조선의 국운은 급격히 쇠퇴하였다.
1905년 을사늑약 체결되어 외교권을 일제에 빼앗겼고, 1910년 대한제국은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다.
제27대 순종[이척] 재위 1907~1910년 8월 29일 한일합병조약이 성립되면서 국권을 상실하였다.
각지에서 주권을 회복하자는 애국계몽운동이 벌어졌다.
강온으로 갈라진 민족저항 역량이 하나로 모아지지 않고 일부 친일 매국노의 암약으로 나라를 잃게 됐다.
일제에 의해 폐위된 순종은 창덕궁에 거주하며 망국의 한을 달래다가 1926년 4월 25일 죽었다.
태정태세문단세예성연중의명선광인효현숙경영정순헌철고순은조선시대임금의묘호를앞글자로만따서부르는방식입니다:)가 묘호를 풀네임으로 부르면 조와 종으로 나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제 아침과 종으로 나누어 부르는 기준을 알아보겠습니다.
묘호란 왕이 죽은 후 종묘에 그 신주를 모실 때 올리는 존호입니다.
묘호는 조(曹)와 종(宗) 두 가지를 사용했는데, 이는 원래 중국의 제도였다고 합니다.
중국에서는 당나라 때부터 사용되었고, 한국도 고려 때부터 그 제도가 도입되었습니다.
물론 고구려의 6대 왕이 태조였고 신라에도 태조 무열왕이 있었지만 삼국시대까지는 묘호라는 개념이 없었습니다.
▶조:창업(국가를 세우는 것)의 공이 있는 임금 ▶종:수성(국가를 발전시키는 것)의 공이 있는 임금
조나라는 글자 그대로 나라를 처음 세운 왕과 나라를 처음 세운 것에 버금가는 업적을 세운 왕만 따라야 합니다.
하지만 이 원칙은 잘 지켜지지 않아서 후손들이 자신의 직계조상을 높이고 권위를 강화할 목적으로 마구잡이로 사용되는 경향이 있었다고 합니다(예:세조, 인조, 정조, 영조, 순조 등). 다만 정실왕후나 후궁출신에 의한 차이로 내리는 호칭은 아니라는 점에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예: 영조는 무수리 아들이지만 창업군주의 묘호인 조가 붙음.) 폐위된 연산군은 성종의 적자이지만 시호는 내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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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으로 조선왕계보태정태세문단 세예성연중인 명선광, 인효현숙경영, 정순헌철, 고순에 대해 정리해 보았습니다 🙂 우리의 역사를 바로 알고 한국사 공부를 시작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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