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인 시모음 [좋은시 추천] 짧은시

이해인 시모음 [좋은시 추천] 짧은시 1

삶과 시

시를 쓸 때는 아까운 말도 얼른 버리면서

인생에서는 작은 것도 버리지 못하는 나의 욕심이 부끄럽다.

열매를 위해 꽃자리를 비우는 한 그루의 나무처럼

아프더라도 아름답게 마음을 열고 결실을 맺어야 한다

종이에 쓰지 않아도 내 인생이 내 안에서 시로 익어가는 소리를 듣는 맑은 날이 온다면

나는 처음으로 살아 있는 시인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기쁨이란

무정하지 말고 가벼워야 기쁨이 되는 줄 알았다

한 알의 근심도 없는 평온한 평화가 기쁨이라고

석류처럼 예쁘게 깨지는 기쁨이 있을 줄 알고 살았다

며칠 병든 지금의 나는

삶이 주는 무거운 것 서글픈 것 나를 괴롭히는 모욕과 오해 속에서도

기쁨을 찾아 보석처럼 갈고 닦는 지혜를 순간마다 새롭게 배운다

순수해야 작아져야 기쁨은 빛난다는 것도 배운다

하루는 기쁨의 큰 보석상을 세상에 장식하고 큰 잔치를 벌이고 싶어서

시의 읽기

이 땅의 시인들이 오랫동안 공들인 시의 즙을 단숨에 마셔 버리는 것은 아무래도 미안하다

좋은 것일수록 소중히 여기고, 두근거리며 조금씩 마시다 보면, 나도 어느 날은 좋은 시를 쓸 것 같은, 포도주색의 황홀한 예감.

시의 음료수에 천천히 취해 잠이 들면 시는 내 안에서 어느새 피와 물이 되어 영혼을 적신다.

흘러가는 삶만이

구름도 흐르고 강도 흐르고 바람도 흐르고

오늘도 흐르는 것만이 날 살게 해

남이 던지는 칭찬의 말도, 이러쿵저러쿵 비난의 말도, 이것이 낳은 기쁨과 슬픔도, 빨리 흘러가거라

흐르는 세월 흐르는 마음 흐르는 사람들

정말 흐르는 삶만이 나를 길들여

어느 날의 일기

내가 당신을 깊이 사랑하는 순간 당신이 나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그 순간은 천국입니다.

이기심의 그늘이 드리워져 서로의 마음에 평화가 없는 그 순간은 지옥이요, 연옥임을 우리는 이미 체험했습니다.

오늘은 너무 오랜만에 단비가 내렸어요.비온 뒤에 더 밝게 웃는다

나팔꽃 한 송이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행복했습니다.

날아간 새 한 마리 나에게 말했어요.꽃이 있고 나비가 있고 마음속에 사랑이 있는 곳이 여기가 천국이죠.놓치지 마세요!

연필 깎고

오랜만에 연필을 깎아서 행복했다.

풋과일처럼 미숙한 나이에 수도원에 와서 익기 전에 썰 것이 많아 힘들었다.

이기심 자존심욕

너무 무리하게 자르려 했지만 때론 통째로 돌아가시는 것 같던 내가 누군지 알 수 없어 주체할 수 없는 눈물도 많이 흘렸다.

중년의 나이가 된 지금도 내게 불필요한 것을 다 깎아내리지 못했지만 나는 나름대로 청빈하고 자유롭다며 여유롭게 잘 웃는다.

나의 남은 날들을 조금씩 잘라내는 세월의 칼날에 아픔을 느끼면서도 행복한 오늘

스스로 한 자루의 연필로 조용하고 자연스럽게 깎으며 사는 지금 나는 왠지 쓸쓸해도 즐겁다.

마음이 마음에

내가 너무 커서 밝지 않은 것 밝지 않은 것 옳지 않은 것.지않은것.

누구보다도 내 마음을 먼저 알고 나에게 충고하네요.

자연스럽지 않은 건 다 욕심이에요귀한 곳인데 이기심을 버려야 순결해집니다.

마음은 보기보다 약하다고요?작은 먼지에도 쉽게 상처난다고요?

언제까지나 눈을 맑게 하려면 먼저 마음을 정리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작지만 옹졸하진 않고 평범하지만 미둔하지 않도록 마음을 다스려 산속 인생이 되겠다고 마음속으로 말하죠.

시간의 무게

살아갈수록 무겁게 다가오는 시간

시간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꽃잎 시드는 사랑

무거운게 힘들어서 슬프지만 점점 나도 무거워지지도 못하겠네

보름달로

당신이 있어 추운 날도 따뜻했고, 바람 부는 날도 중심을 잡았습니다.

슬픔 속에서도 웃을 수 있는 위로가 되었어요.

모난 제가 당신을 닮으려고 노력한 세월의 선물로 저도 벌써 보름달이 되었네요.

사람들이 모두 보름달로 보이는 이 눈부신 기적을 당신에게 바칩니다.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행복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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